'시계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4.02.17 위블로
  2. 2014.02.17 PP: 파텍필립
  3. 2014.02.17 VC: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이야기2014. 2. 17. 10:34




<이 기사는 FORTUNE KOREA 2013년 10월호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위블로는 최근 가장 핫한 브랜드다. 유럽 왕가의 선물로나 사용되던 이 ‘조용한’ 브랜드는 희대의 풍운아 장 클로드 비버가 CEO를 맡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브랜드로 거듭났다. /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하이엔드급 시계 브랜드들은 자존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최고로 평가받는 브랜드들조차도 서로 비교되는 것을 꺼린다. 그렇다 보니 
경영도 굉장히 비밀스러운 면이 많다. 얼마나 많은 시계를 팔았는지, 매출액은 어느 정도인지 등 중요한 경영사항은 ‘노코멘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 정보 하나하나가 다른 브랜드와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가장 핫한 브랜드가 어디냐’는 질문의 답은 그래서 어렵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약한 데다 소비층이 워낙 얇기 때문이다. 하이엔드급 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 자체가 드물다 보니 어느 브랜드가 인기인지 확인하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모든 브랜드의 적, 흔히 짝퉁이라 불리는 모조품 시장을 모니터링하면 대강의 흐름을 읽을 수가 있다. 모조품 시장은 해당 업계의 최신 트렌드를 가장 잘 반영하는 바로미터로 평가된다.

우리나라 모조품 시장의 메카로 불리는 동대문시장에서 최근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시계 브랜드는 단연 위블로 Hublot이다. 굵직하게 떨어지는 선, 클래식하면서도 역동적인 위블로의 이미지가 최근 젊은 화이트칼라층의 기호에 부합하면서 모조품 시장이 이를 재빠르게 반영했다는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위블로는 이탈리아의 시계 제작자 카를로 크로코 Carlo Crocco가 1980년에 만든 브랜드다. 카를로 크로코는 우아하면서도 정열적인 이탈리아 스포츠 정신에서 위블로의 영감을 얻었다.

카를로 크로코는 창립 당시 위블로의 성격을 ‘유행과 상관없이 편안하고 우아하며 미니멀하고 스포티한 브랜드’로 정의한 바 있다. 위블로가 클래식하면서도 역동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창립자인 카를로 크로코의 영향이 컸다.

비교적 최근에 론칭한 브랜드이지만, 위블로의 가치를 알아본 시계 마니아들 덕분에 위블로는 단숨에 하이엔드 워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특히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 Carl XVI Gustaf가 노벨상 수상식에 위블로 시계를 차고 참가한 것이 알려지면서 ‘왕들의 시계’라는 타이틀을 얻은 게 주효했다. 위블로는 현재에도 유럽 왕정 국가들 사이에서 왕들의 공식 선물로 건네진다. 모나코 왕족들부터 앤디 워홀Andy Warhol 같은 예술가들에 이르기까지 위블로에 대한 사랑은 세계 도처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특별한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탔던 위블로지만, 위블로가 세계 워치 메이커사들 중에서도 좀 더 특별한 브랜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2004년 CEO에 오른 세계 시계 산업계의 풍운아 장 클로드 비버 Jean-Claude Biver의 역할이 컸다. 스위스 출신의 장 클로드 비버는 현재도 세계 시계 산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장 클로드 비버는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브랜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시계 산업계에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세계 시계 산업계를 양분하고 있는 스와치그룹 및 리치몬트그룹과도 깊숙이 관계된 인물로, 이전에 이들 그룹 산하의 브랜드들을 맡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낸 경험이 있다.

장 클로드 비버는 취임하자마자 위블로의 브랜드 정체성에 ‘퓨전아트 Art of Fusion’를 추가시켰다. 위블로는 시계 제조 역사상 처음으로 고무소재와 골드를 결합한 시계를 창안하는 등 이전부터 ‘퓨전’과는 밀접한 관계에 있던 브랜드였다. 장 클로드 비버는 이런 위블로의 특징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 첫 결과물은 2005년에 론칭한 ‘빅뱅 Big Bang’ 컬렉션이다. 장 클로드 비버 취임 1년 만에 나온 빅뱅 컬렉션은 위블로가 추구하는 퓨전 콘셉트의 진수를 보여준다. 외관에서 보여주는 선과 곡선, 클래식과 다이내믹의 이미지 퓨전은 물론 골드와 세라믹, 탄탈과 러버 등 이질적인 소재들의 결합이 이전 하이엔드 워치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빅뱅 컬렉션은 각국의 시계 마니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전 세계적으로 큰 히트를 했다. 2004년 약 2,600만 달러 매출을 올리던 위블로는 빅뱅 컬렉션 론칭 3년 만인 2008년 약 3억 달러 매출을 올리면서 무려 10배가 넘는 성장을 하게 된다.

2008년, 위블로는 또다시 브랜드 역사의 변곡점이 될 큰 사건을 맞는다. 세계 최대 명품 유통업체인 프랑스의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LVMH·Louis Vuitton Mone··t Hennessy)사가 인수를 추진한 것이다.

스위스 시계기업인 위블로가 프랑스에 본사를 둔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에 인수되는 것을 두고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위블로로서는 탁월한 선택을 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경쟁 하이엔드 워치 브랜드들이 스와치나 리치몬트 등의 거대그룹에 편입되면서 막대한 자금력을 등에 업고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 클로드 비버는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가 위블로를 인수한 후에도 여전히 위블로의 CEO를 맡았다. 그의 마케팅적 역량을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가 몰라볼 리 없었다. 업계에서는 장 클로드 비버와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의 결합을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둘의 시너지 효과는 엄청났다.

위블로의 인지도는 급상승했다. FIFA와 F1 등 시장에서 압도적인 네임밸류를 자랑하는 단체의 공식 후원사로 발탁된 배경도 장 클로드 비버와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의 결합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위블로는 이외에도 영국의 축구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 페라리 등의 공식 파트너로도 활동하고 있다.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위블로는 기술적인 면으로도 크게 진화했다. 컴플리케이션 제작을 함께했던 BNB 콘셉트의 인력들을 상당 부분 흡수, 2010년 최초의 인하우스 칼리버 HUB1240 유니코 무브먼트를 세상에 내놓았다.

유니코 무브먼트 개발을 위해 위블로 개발자들은 무브먼트라는 핵심부품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들은 시계의 안정성과 내구성 향상을 위해 복잡한 연동기관을 최대한 단순화시키길 원했다. 단순할수록 오차가 적어질 것이란 명확한 논리였다.

그런 점에서 유니코 무브먼트는 기타 무브먼트와 차별화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점퍼 없는 크로노그래프라든가 카운터를 직접 작동시키는 배럴, 따로 제거 가능한 플랫폼 위에 고정된 실리콘 소재의 팔렛 포크와 이스케이프먼트휠 등이 그 예다.

승승장구하던 위블로는 2012년 또다시 경영에 변화를 꾀한다. 장 클로드 비버의 오랜 친구인 리카르도 구와달로프 Ricardo Guadalupe가 새 CEO로 선임된 것이다. 장 클로드 비버의 업계 은퇴 수순이 아니냐는 의혹도 일었지만, 장 클로드 비버가 회장직에 오르면서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올해는 위블로 론칭 33주년이자 장 클로드 비버가 65세를 맞이한 해이다. 올해도 위블로는 빅뱅 유니코 Big Bang Unico, 라 페라리 La Ferrari 등 혁신적인 모델들을 내놓으며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위블로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 예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장 클로드 비버라는 최고의 워치 마케팅 천재가 키를 잡고 있고,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라는 큰 산이 뒤를 받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브랜드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시계 마니아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http://economy.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industry/201401/e2014010416505147430.htm&ver=v002

Posted by JsPark21
시계이야기2014. 2. 17. 10:26

* 스크랩기사 입니다.





<이 기사는 FORTUNE KOREA 2013년 7월호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파텍필립 Patek Philippe은 시계 브랜드의 ‘끝판왕’ 혹은 ‘왕 중 왕’으로 불린다. ‘당신은 파텍필립을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잠시 맡아두고 있을 뿐입니다’는 광고 카피에서 시계 브랜드 NO.1 파텍필립의 아우라를 엿볼 수 있다. /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시계 브랜드에 종합 순위를 매긴다고 생각해보자. 특정 브랜드의 순위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각각의 브랜드들이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경주한 기간만 수백 년이기 때문이다. 관점에 따라, 취향에 따라, 추구하는 기술력에 따라 특정 브랜드에 대한 가치는 큰 차이를 보일 수도 있다.


순위를 정하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임에도 No.1에 대해서는 의외로수월하게 의견수렴이 된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워치메이커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계 브랜드. 기술·역사·디자인 등 시계 브랜드를 평가할 수 있는 모든 항목에서 최고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브랜드. 바로 파텍필립이 그 주인공이다.

파텍필립의 역사는 183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폴란드를 떠나 스위스로 이민 온 두 망명객 안토니 파텍 Antoni Patek과 프랑소와 차펙 Fran˛cois Czapek이 제네바에 파텍차펙 Patek Czapek & Cie을 창립하면서 브랜드가 시작됐다. 안토니 파텍은 경영자로서 사업수완을 발휘했고, 프랑소와 차펙은 워치 메이커로서 시계 제작을 맡았다.

파텍필립이 시계 브랜드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1844년 프랑스 태생의 천재 워치 메이커 장 아드리앙 필립 Jean-Adrien Philippe을 만나면서부터다.

장 아드리앙 필립은 1815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역시 우수한 시계 장인으로, 기술 개발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부친의 영향을 받은 장 아드리앙 필립은 21세에 이미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개발, 1년에 150여 개의 포켓 워치를 생산하는 소규모 매뉴팩처를 설립하게 된다.

시계 장인으로서 그의 천재성이 빛을 보기 시작한 건 그의 나이 27세였던 1842년, 열쇠 없는 시계를 개발하면서부터다. 그는 시계의 용두로 시간을 조정하는 스템 와인딩 시스템 Stem-winding system(Keyless winding mechanism이라고도 한다)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당시 회중시계는 태엽을 감는 부속품인 열쇠가 필요했는데, 장 아드리앙 필립이 이러한 불편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는 시계사에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시계 제작에서도 장 아드리앙 필립은 탁월한 솜씨를 자랑했다. 1844년엔 파리 만국박람회에 직접 제작한 시계를 출품해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젊은 나이지만 시계 제조 기술력으로는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였다.

만국박람회에서 장 아드리앙 필립의 시계를 본 안토니 파텍은 그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뛰어난 경영자였던 안토니 파텍은 장 아드리앙 필립의 가치를 한 번에 알아봤고, 그를 자신의 회사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1844년, 공동 창업자였던 프랑소와 차펙이 독자적인 길을 가기로 하면서 회사를 떠났다. 파텍차펙 브랜드명도 파텍 Patek으로 변경됐다. 하지만 1951년, 안토니 파텍의 삼고초려로 장 아드리앙 필립이 합류하면서 사명이 또 한 번 바뀌어 현재의 파텍필립 Patek Philippe이 됐다. 이후 파텍필립은 1932년 다이얼 공급자였던 찰스 스턴 Charles Stern과 장 스턴 Jean Stern 형제에게 최종 인수됐고, 현재까지 스턴 집안의 가족 기업으로 4대째 내려오고 있다.

파텍필립은 기계식 시계의 최정점에 서 있지만, 쿼츠 시계의 개발에도 상당한 열정을 쏟고 있다. 파텍필립은 1948년 이미 전자기술 담당 부서를 설립했으며, 1950년대부터는 쿼츠 기술을 연구·개발해 다수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1956년엔 최초의 쿼츠 탁상시계를 선보였고, 같은 시기 전자시계 등을 상업화하기도 했다.

파텍필립이 가지고 있는 No.1으로서의 자존심은 2009년 자체적으로 개발한 파텍 필립 인증(Patek Phillipe Seal)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2009년 이전까지는 제네바 인증(Geneve Seal)을 사용했다. 제네바 인증만 해도 이를 통과하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스위스 연방 정부에 의해 임명된 7명의 위원이 철저한 검증을 하기로 유명하다. 무브먼트 한 종류당 100개, 모델에 따라선 800개 이상의 부품을 자체 기준에 따라 검수한다.

하지만 파텍필립이 보기엔 이 기준마저도 너무 낮았다. 파텍필립은 좀 더 고고한 기술력을 뽐내고 싶었기에 제네바 인증보다 훨씬 까다로운 자사 인증 시스템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파텍필립이 시계 브랜드의 No.1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극도의 프라이드가 장인정신에 투영된 결과다.

파텍필립은 명실상부 시계 브랜드의 왕 중 왕으로 손꼽힌다. 오늘날 파텍필립의 시계는 전 세계 60여 개 국가 450여 개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연간 시계 생산량은 약 4만5,000개이며, 이 중 기계식 시계가 3만5,000여 개, 쿼츠 시계가 1만여 개를 차지하고 있다. 기본 칼리버 수는 23가지이며 이를 활용한 무브먼트는 50여 개나 된다. 1만 개 이상의 부품을 사용하며, 연간 1,500만 개 이상의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http://economy.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economy/201401/e2014010321443869890.htm&ver=v002

Posted by JsPark21
시계이야기2014. 2. 17. 10:22

이곳은 제가 만든 컨텐츠가 실리는 곳이 아니라, 스크랩 모음입니다. 좋은 정보 얻어가시길...


[시계 브랜드 이야기] ① 바쉐론 콘스탄틴


이 기사는 FORTUNE KOREA 2013년 6월호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올해로 탄생 258주년을 맞았다. 창립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아온 이 시계 브랜드는 그 역사만큼이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 갖고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특별한 브랜드 스토리 몇 가지를 소개한다. /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10년 3월 10일. 미술품 전문 경매회사 K옥션이 오래된 회중시계 한 점을 메이저 경매에 올려 화제가 됐다. 시작가 5,000만 원이었던 이 회중시계는 1억2,500만 원에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한 개인에게 최종 낙찰됐다.

이 경매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까닭은 회중시계의 첫 주인이 순종이었기 때문이다. 순종의 국장 과정과 부장품, 장례에 쓰인 도구 등을 찍은 사진첩 ‘어장의사진첩 御葬儀寫眞帖’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시계 뒷면에 새겨진 이화문 모양은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한다.

당시 경매로 또 한 번 주목받은 시계 브랜드가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이다. 회중시계 정면에 새겨진 브랜드명과 시계 뒤편 뚜껑 안에 새겨진 장인 이름이 고고한 바쉐론 콘스탄틴의 브랜드 이미지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대한제국 황실이 사용하던 시계 브랜드’로 유명세를 탄 셈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은 건 1800년대 말 개화기 때부터다. 이때는 우리나라가 서양의 여러 나라와 외교 접촉을 시작하던 때로, 당시 가장 많이 들여온 외래 문물 중 하나가 시계였다. 당시에는손목시계가 일반화되기 전이어서 모두 회중시계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시기 황실과 고위 관리들 사이에서는 시계를 가지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특히 순종의 시계 사랑이 유별났다.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는 많은 시계가 있었는데 순종은 이 시계들이 정시에 맞춰 종을 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순종은 덕수궁에서 지내던 고종에게 문안 전화를 할 때에도 매번 시간을 물어봤다. 순종의 일과 중 하나는 고종의 시계와 창덕궁 시계 시간을 맞추는 것이었다.

바쉐론 콘스탄틴 역사의 출발점은 17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민한 시계 제조업자 장-마크 바쉐론 Jean-Marc Vacheron(1731~1805)이 스위스 제네바의 심장부 릴 지역에 워크숍을 연 것이 그 시초였다.

바쉐론은 손꼽히는 시계장인이었다. 그가 제작한 시계들은 국경을 넘어 명성을 떨쳤다. 두 아들 아브라함 Abraham과 자크-바텔레미 Jaques-Barthe´lemy가 대를 이어 그의 워크숍을 이어받았고, 1819년에는 유능한 사업가 프랑수아 콘스탄틴 Franaois Constantin(1788~1854)이 합류하면서 현재의 브랜드명 ‘바쉐론 콘스탄틴’이 탄생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선 바쉐론 콘스탄틴의 인지도가 상당했다. 당시 바쉐론 콘스탄틴이 중국에서 높은 인지도를 갖게 된 데에는 1819년 합류한 프랑수아 콘스탄틴의 역할이 컸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에 수출할 시계 상품을 개발하는 데 보냈다.

당시 중국인들의 독특한 취향을 만족하게 할 여러 모델이 나왔는데 이들 시계에는 ‘황제 스타일’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주로 황제를 위한 시계였기 때문이다. 이들 시계에는 화려한 에나멜 장식이 가미되거나, 귀족들이 선호하는 보석인 진주가 외관을 수놓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스타일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어 당시 중국이 유럽 시계 브랜드들의 주요 수입원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상징인 말테 크로스Malte Cross는 1880년에 상표등록이 됐다. 이 십자가 모양의 형태는 처음엔 배럴을 보호하는 덮개로 디자인됐다. 이후 말테 크로스가 바쉐론 콘스탄틴을 연상시키는 상징적 표식이 되면서 차츰 다이얼 패턴이나 스트랩, 버클 등으로 쓰임이 확대됐다.

같은 시기, 중동지역에선 마니아층이 생길 정도로 바쉐론 콘스탄틴의 인기가 높았다. 특히 유명한 이들로는 이집트 왕 푸아드 Fuad(1868~1936)와 그의 차남이자 이집트의 마지막 왕인 파루크 Farouk(1920~1965)가 있다.

극성 수집가였던 파루크 왕과 바쉐론 콘스탄틴 사이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1937년, 청년이었던 파루크는 왕자 신분으로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하게 된다. 이때 그는 바쉐론 콘스탄틴사를 몹시 가보고 싶어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쉐론 콘스탄틴사는 그를 직접 작업장에 초대하게 됐는데,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파루크가 시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파루크는 수없이 많은 고가 시계들을 분해해 봤기 때문에 작업장에서 해박한 지식을 뽐낼 수 있었다. 후에 제네바시는 파루크를 위해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만든 시계를 선물했는데 그 시계에는 다이얼 바늘만 13개가 달려 있었다. ‘파루크가 분해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복잡하게 설계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00년대 중반 이후 바쉐론 콘스탄틴의 명성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1970년 오일쇼크 때 다소 시련을 겪기도 했고, 쿼츠 무브먼트의 등장으로 1980년대 침체기를 맞기도 했지만, 바쉐론 콘스탄틴만의 기술력과 예술성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했다. 1996년 경영 전문화를 위해 리치몬트 그룹에 인수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1755년 첫 론칭 때부터 현재까지 스위스 제네바 릴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 지역 자체가 바쉐론 콘스탄틴의 브랜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1906년 같은 지역 케드릴 구역에 처음 문을 연 부티크 역시 같은 장소에서 현재까지 충실히 역할을 수행 중이다. 부티크 2층에는 헤리티지 갤러리가 있어 과거의 시계 제조 도구나 바쉐론 콘스탄틴의 옛 시계 모델들을 감상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4년, 바쉐론 콘스탄틴은 작업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서쪽으로 4마일 정도 떨어진 플랑 레 조테Plan Les Ouate 지역에 새로운 매뉴팩처를 설립했다. 이 새로운 건물의 미래지향적 외관과 현대적 내부시설에도 불구하고 바쉐론 콘스탄틴은 여전히 수공으로 시계를 제작하고 있다. 시계 공정에 대한 바쉐론 콘스탄틴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260년 가까이 시계 브랜드 최고봉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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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sPark21